치료에 있어 부모의 역할
아이는 크면서 가정에서는 가족들, 학교에서는 친구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며 배워나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해도 괜찮은 것과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적 발달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행동들을 하는 와중에 기쁨, 슬픔, 분노, 실망, 성취감등을 느끼면서, 이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감정적 발달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감정적 발달이 잘 이루어진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의 행동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조절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갑니다.
하지만, 이성적 발달과 감정적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부분을 식이장애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려 합니다. 식이장애야 말로 음식과 체중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절하려는 ‘조절’이 지나친 병이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음식과 체중을 통해 조절함으로서 ‘조절감’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당신의 자녀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인 당신은 자녀가 마음의 여유를 지니면서도 이성과 감정의 합리적 기준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 역할에 있어서의 걸림돌 이해하기
식이장애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난관이 있습니다.
당신은 몇 가지나 되는 걸림돌에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춘기 때는 다 그래” 걸림돌
사춘기는 신체적으로는 호르몬의 변화, 사회적으로는 역할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적지 않은 혼란을 유발하지요.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네요.” 사춘기는 감정의 잦은 변화로 인해, 충동적이고 버릇이 없어지는 시기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도 으레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무시하며, 대화 또한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정도를 벗어난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자녀가 이런 행동들을 통해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의 상충되는 견해” 걸림돌
많은 전문가들이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자녀를 위해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컨대, 다이어트 전문가와 식이장애 전문가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다이어트의 부작용이나 식이장애의 양상을 보인다면, 식이장애 전문가의 견해에 따를 것을 권합니다. 단순한 육체적 문제 이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 경우에는 심리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 전문가가 필요한 곳에 불을 지펴주는 역할을 한다면, 식이장애 전문가는 불이 지나치게 커질 때, 불을 꺼주고 다시 재건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체중의 공포” 걸림돌
자녀가 과체중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만 하다보니, 과체중에 대한 공포와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저지방, 저칼로리 음식만 고집한다면 아이는 건강한 식생활이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건강한 식생활이란 적절한 음식(편식하지 않고)을 적절한 때(적절한 식사시간)에 적절하게 섭취(적절한 양과 횟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제한하고 균형 잡히지 않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 같은 부모” 걸림돌
부모가 마치 친구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유혹도 큰 걸림돌이 됩니다. 친구처럼 행동한다면 당신은 자녀에 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잃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것은 부모의 역할은 아닙니다. 자녀에게 공감하는 것은 좋지만 병의 증상을 의도치 않게 악화시키는 것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 내의 부적절한 의사소통” 걸림돌
가족 내의 건강한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어떻게 가족들 간의 관계가 이루어 지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말로써 표현되는 것만이 아니라, 말이 아닌 미묘한 행동과 분위기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TV를 보면서 뚱뚱한 연예인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자녀는 “아버지는 뚱뚱한 사람을 혐오한다. 결코 나는 뚱뚱해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은 당연합니다. 또는 어머니가 매일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며,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 입는 것을 선호한다면, 이것은 알게 모르게 딸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 걸림돌
딸의 숙제가 곧 어머니의 숙제가 되고, 딸의 옷이며 헤어스타일, 동성친구, 이성친구에 관한 문제까지도 일일이 간섭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자녀가 움직이도록 만들었으면서, “우리 아이는 나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요” 라고 아이 탓을 하는 부모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개성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나친 허용” 걸림돌
부모가 그 자신의 부모의 지나친 간섭 하에서 자라난 경우는 억압받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녀에게는 오히려 과도한 허용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실적 이유로,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는 퇴근 후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너무 일찍 자녀에게 과도한 자유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 못한 채, 식이장애를 통해 자신을 조절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자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식이장애를 가진 자녀를 돕고자 할 때,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생활방식이 자녀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거식증을 가진 딸에게 케이크도 조금 먹어보라고 권유합니다. 하지만 딸은 케이크를 먹은 후에 미친 듯이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자녀가 폭식을 하지 않도록 하루에 섭취해야 할 칼로리를 1200칼로리로 계산해서 자신이 제한을 해주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칼로리를 제한해주는 것이 훨씬 더 조절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칼로리의 제한이 폭식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체중이 늘까봐 노심초사하는 딸에게 매일 1시간씩 운동을 하라고 권유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딸이 체중 걱정만 하면서 운동은 하지 않으니 한심해 보였겠지만, 딸은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에 운동까지 한다면 몸에 큰 무리가 와서 갑자기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이들 부모들은 조절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자녀에게는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너무 많이 통제하려고 하고, 또 어떤 부모는 자녀에 대해 지나치게 방관합니다. 자녀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또 적당한 때에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자녀가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자신감을 가지며 발달하는데 키포인트(Key Point)가 됩니다. 이때 부모가 유연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는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어려워집니다. 특히 예민한 성격을 보이는 자녀에게는 부모의 유연한 말과 행동이 매우 중요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는 좋은 의도로 행한 일이지만 실제로 자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어 혼란스럽다면, 식이장애 전문치료자와 상의해보길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님께 하고 싶어 하는 말들은 과연 무엇일까.
- 나에게 무엇을 먹으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엄마가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언가 묻고 싶어지신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해도 좋겠냐고 물어봐 주세요. 만약 제가 싫다고 한다면 그때는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고, 나중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
- 엄마는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나 자체를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 내가 자발적으로 엄마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여유를 가져 주세요. 하지만 제가 계속 주저하고만 있다면 너무 기다리시지만 말고 다가와 주셨으면 해요.
- 아직까지는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것이 힘들어요.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도시락을 싸 주세요.
- 다른 사람들이 나의 외모를 놀릴 때 잠자코 보고만 있지 말고 나를 도와주세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입으니까요. 그럴 땐 엄마의 이해와 위로가 필요해요.
- 내가 저칼로리 음식만 요구한다고 해서 모조리 그런 음식들만 사 오지는 마세요. 사실 그게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 부모님 자신의 일도 충분히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저 때문에 부모님의 생활이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요.
이런 자녀의 바람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자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기 어렵거나 궁금하면 자녀에게도 물어보고,
치료자와도 상의해 봅시다.
중요한 것은 자녀와 당신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닐까요.